<일본언론 보도내용>
일본인과 한국인중 누가 먼저 축구를 시작했나?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영향 주고받으며 축구를 즐겨온 국가로, 양국에서 풋볼은 서양식 교육과 함께 흥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뉴스기사입니다. 이에대해 누가먼저 시작했느냐에 관련한 의견이 있는데, 이에 대한 일본의 반응입니다.
"일본에 전해진 것은 에도시대"
일본과 한국(조선)의 축구 교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예를 들어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라든가 '남북 분단' 등 그때그때의 정치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일본과 조선에 풋볼로 불리는 영국 태생의 근대 스포츠가 전파됐을 때도 마찬가지다.그동안 쇄국정책을 관철해 온 양국이 서양의 압력을 받아 드디어 개국으로 방향을 틀려 했던 시대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으로서는 고난의 역사의 시작이기도 했다.개국한 조선을 세력권에 두기 위해 일본, 청국(중국), 러시아가 진출을 꾀하면서 1910년 조선은 일본에 병합되고 만다.
일본에도 조선에도 축구와 같은 발로 공을 다루는 놀이는 예로부터 존재해 왔으며 서민들에게도 친숙했다. 하지만 모두 공을 다루는 기술을 겨루는 놀이로 공을 서로 빼앗아 상대 골로 넣는다는 영국 축구와는 전혀 달랐다.
그런 양국에 풋볼이 전파된 것은 19세기 후반.일본의 경우는 1860년대 중반이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1858년에 미국, 영국 등 5개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 이듬해인 1859년 나가사키, 하코다테, 가나가와 등 3개 항을 개항했다.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에도에 가까운 가나가와였지만, 막부는 인구가 많은 가나가와의 개항을 싫어해 강 건너 요코하마 마을에 외국인 거류지를 건설.거류지에는 영국인 등 유럽 각국의 상인들이 모였다.
그 당시에는 축구와 럭비 규칙에 큰 차이가 없었다
요코하마에서는 경마와 사격, 보트, 육상, 크리켓 등 다양한 스포츠가 열렸다.현지에서 발행되고 있던 영자신문에 의하면, 1866년 1월 26일에는 「요코하마 풋볼 클럽」이 결성되어 있다.이것은 클럽 결성 날짜이기 때문에 시합은 그 이전부터 행해졌을 것이다.
1874년 시점에서 거류지의 인구는 약 1200명.이들 중 70%가 남성이었으며, 그 외 개항 직후에는 1000명 이상(최대 시에는 약 3000명)의 영국 육군이 야마노테 지구에 진주해 있어 스포츠 활동을 하기에 충분한 인원이었다.군인 대 민간인 소방단 대 기타 경기가 열렸고 영국 해군 함정이 입항하면 선원팀과의 경기가 짜여졌다.
1868년 1월에 개항된 고베에서도 스포츠는 성행했지만, 고베의 거류지는 작고 군대도 주둔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요코하마만큼의 인원은 모이지 않았다.
당시 진행된 풋볼은 축구였느냐, 럭비였느냐는 논란도 있다.그러나 런던에서 축구협회(FA)가 결성되고 통일룰(축구규칙)이 제정된 것은 1863년으로 새 룰은 아직 영국 전역에 보급되지 않았고 럭비협회(RFU) 결성은 1871년이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축구와 럭비의 룰에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거류지의 거주자가 「축구인가, 럭비인가」등이라고 의식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그냥 풋볼의 전래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풋볼이 조선에 전래된 것은 일본보다 15년 정도 늦은 1882년 6월의 일이었다.제물포에 입항한 영국 해군 측량선 플라잉피쉬의 선원들이 조선 측 허가 없이 상륙해 풋볼에 흥을 돋운 것이 최초였다.
"조선 개국까지의 역사"
제물포라는 것은 현재 인천의 다른 이름이다.인천은 수도 한성(한성=현재의 서울)의 오랜 외항으로 지금도 한국과 세계를 잇는 거대한 허브공항이 존재한다.
서울역에서 경인선을 타고 인천으로 가면 제물포라는 역이 있다. 한 정거장 앞 '도원'은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의 본거지 인천축구전문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다.
1392년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17세기부터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청나라에 조공했으며 에도시대에는 대규모 통신사를 파견하는 등 일본과도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했다.그러나 조선은 서구 국가들에 대해서는 쇄국을 계속하고 있었다.
19세기가 되면 동아시아에도 서구 각국이 진출한다.일본은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하고 개국하자 그 후 근대화에 매진.메이지 신정부는 조선에 대해 개국을 압박했고, 1876년에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 후에도 서구 국가들에 대해서는 쇄국을 계속하고 있어 각국의 개국 요구가 거세지고 있었다.
1873년 소형 범주전함으로 건조돼 1880년 측량선으로 개조된 플라잉피시호가 조선에 온 것은 그런 때였다.
1882년 5월 조선은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그래서 영국도 조약 체결을 압박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한 것이다.1882년 6월에는 제1차 영조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영국은 보다 유리한(조선에 있어서는 불평등한) 내용으로의 개정을 요구하였고, 다음 해인 1883년 11월에 제2차 조약이 체결되게 된다.
1882년 7월에는 임오군란이라 불리는 조선군의 반란이 일어났다.
왕비, 민비의 정권이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그에 반대하는 군이 반란을 일으켜 민비는 가까스로 왕궁을 탈출했다.일본이 한성에 두고 있던 공사관도 폭도에게 습격당해 하나부사 요시미루 공사들은 공사관을 탈출. 제물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해상으로 나온 하나부사 공사들을 구출해 나가사키항으로 보낸 것은 그 플라잉 피쉬였다.
"메이지시대에 서양인의 지도가 행해지다"
1882년 7월에는 콜벳함 엔카운터호와 플라잉피쉬호가 다시 제물포에 입항했다.이때는 영조조약 체결 후였기 때문에 승무원들은 한성 등지를 방문했다.이번에는 한성에 있던 '훈련원'(조선군 연병장)에서 축구를 선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인이나 조선인이 처음으로 풋볼을 플레이한 것은 언제일까?
조선에서는 1862년 6월 '플라잉 피쉬'가 왔을 때 제물포 조선인들이 선원들이 두고 간 공을 가지고 놀았다고도 전해진다. 한편 막부 말기 일본에서는 외국인들의 스포츠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일본인이 모였지만 아쉽게도 일본인들이 풋볼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없다.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풋볼은 서양식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에서 퍼져나갔다.
일본인 학생이 처음으로 풋볼을 플레이한 것은 도쿄 쓰키지의 「해군병학 기숙사」및 토라노몬의 「공부성 공학 기숙사」에서, 1873년부터 74년에 걸친 겨울의 일이었다.
해군 병학기숙사는 해군사관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메이지 신정부가 초빙한 영국 해군의 아치볼드 L 더글러스 중령 이하 고문단이 지도를 맡았다.더글러스 중령은 학생들의 체력 증강을 중시해 승마 검술 등에 더해 크리켓 풋볼 등 영국 스포츠를 커리큘럼에 도입했다.
한편 공부성 공학기숙사는 건축가 양성을 위한 학교로 도쿄대 공대의 전신이다.교사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 헨리 다이어 교수 등으로 측량기사 리처드 라이머 존스가 저수지에 마련된 운동장에서 풋볼을 포함한 다양한 스포츠를 지도했다.
"한일의 공통점을 되돌아보다"
그 후 풋볼은 구제중학교 교육에 도입되어 20세기에 들어서자 도쿄고등사범학교(츠쿠바대학의 전신) 축구부가 본격적으로 축구 강화에 나서 졸업생들은 각지의 구제중학교로 부임해 축구를 확산시켜 나갔다.
조선(1897년부터는 '대한제국') 학생들이 축구에 친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보다 훨씬 늦었다.개국 시기도 늦었고 거국적 근대화에 매진했던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혁신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계속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02년에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배재학당에서 축구반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전해졌으며 1905년에는 관립 외국어학교 프랑스 교사로 영국 유학 중 축구를 배웠다는 마텔이 축구 지도를 시작했다.
시기는 다르지만,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개국 전후에 온 영국인들이 풋볼을 반입하고, 근대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학교에서 외국인 교사의 지도로 축구가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한일 양국 축구의 기원에는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
<댓글>
roh********
일본의 축구 강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당시 축구 강국이었던 버마(현 미얀마) 사람이었습니다.역사를 더듬어 보면 여러 가지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반대로 지금의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ㄴ正論自由
캬우 딘(1920년대 미얀마 출신 축구선수,일본 축구 지도자)의 축구 서적은 바이블이었어요.
cab********
어느 쪽이 먼저였다던지, 그게 뭐 어떻다는거지...?지나간 일만 떠들고 있지만,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거야. 왜 인간의 눈은 앞만 볼수 있도록 만들어졌을까?그는 시간은 앞으로만 가니까 똑바로 앞을 보고 나아가라.뒤(과거)만 돌아본 채 앞으로 나아가면 넘어져 버린다. 뒤(과거)는 가끔 뒤돌아보는 것만으로 좋다.'고 신이 대접해 주었다고 생각한다(주관입니다.클레임은 받지 않아요~). 게다가 그 당시의 산증인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죽은 사람에게 검증할 방법이 없잖아요.
ㄴiwa********
제목 보고 한겨레 기사인 줄 알았어요.
都晩飯人
역사적 배경이 훨씬 신경 쓰이는 기사(쓴웃음)
민비의 도망에 대한 전체적인 상황이라던가.
몇 년, 몇 십 년 먼저 플레이 했는데 그래서 뭐? 같은 느낌이네.
기원 논쟁이 되면 이 이야기는 별개이지만."검도는 한국 발상"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없죠..
한국이 기원에 집착하는 것은 독자적인 문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제2차대전후 식민지 자주독립의 시대. 독자문화 부흥을 목표로 국민국가 성립의 상징으로 삼았다. 인도라면 영국식민지 지배로 소멸한 면산업의 상징으로서 실 명주 기계. 한때 국기에도 디자인되어 있었다.
이씨 조선 양반층은 한인의 명왕조 멸망 후 정복당하고, 청나라왕조를 정당한 후계자로 보지 않고,
이씨 조선이야말로 정당한 중국 문화 계승자라고 하니.. 결과 독자 문화는 발달하지 못했다.
즉 한반도에는 '독자문화'가 적다. 자국기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독자문화가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도 이상해.
일본해가 있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대륙을 의식하지 않고 끝났을 뿐이니까요.
dai********
기원을 신경 쓰는 나라와 같은 심정이 있는 듯한 연출을 시도하는 현대는 상당히 자학적이네. 더운 날이 계속되어서 피곤했나봐.
nut********
그런 작은 사건이라도 좋아.일본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라도 있지 않을까 하고 시작한 것이 축구라고 한국인 자신이 말했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는 일일 것이다.
ngn********
아무래도 좋은 일.
축구 등 어차피 서양에서만 오는 문화다.
예로부터 축구을 즐긴 것으로 충분하다.
tm_********
사람으로 한정하면 '미우라 가즈요시' 선수 아닌가요?
(이름이 틀렸다면 죄송합니다)
지금도 현역으로 해외에서 뛰고 있고...
한국인으로는 누가 먼저일까요?
미우라 선수보다도 전......에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ㄴyos********
더 앞에 카마모토 구시니게도 있어서 유명 선수로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
ㄴu*b**d*e
차범근이라던가 있네요
tkh********
어느 쪽이 먼저인지 신경 쓰는 것은 한국 뿐이겠지요. 아니면 아예 축구는 자기나라 발상이라고 해버릴수도 있어ㅋ.
mar********
축구 발상지도 아닌데 일본과 한국을 비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mii*****
기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웃나라 기사를 인용해 축구라는 새로운 소재 제공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pxp*****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든 상관없지만…
kan
일본인 기자가 쓴 기사?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다든가, 아무래도 좋아(웃음)
그런건 비교해서 뭐 어떡해...
snh********
축구와 피자는 한국기원이라고 우리끼리 말했었잖아.
벽화까지 소개해줘 ㅋㅋㅋ
sga********
일본인이 축구를 시작했을때 한국은 전쟁을 하고 있었잖아..
red********
기사 제목을 보고 아무래도 좋은 기사로 생각되었다!
har********
일찍 시작했으니까, 그게 뭐라고 화가 났어요?
qbc********
아무래도 상관없어.
먼저 뛰기 시작한다고 해서 승리를 양보할 수는 없잖아.
なぎら☆けんいち
어느쪽이 먼저냐 축구는 한국기원 아니었니?
匿
어느쪽이든 좋아!
shi********
그런건 어느쪽이든 좋아!
sos********
추악한 싸움
이것은 어느 쪽이든 좋다.
tak********
어디든 상관없는 얘기.무슨 문제 있어?
mwt
아시아 호랑이라고 할 정도니 한국이겠지.
검도도 기원은 코무도(한국식 검도 표현)이고
sqq********
확실한 건 태권축구는 한국 기원이라는 거예요.자랑스럽겠지요.
ono********
아니, 축구의 기원은 조선 남부(현 한국)예요.뭐든지, 어느 벽화에 풋볼을 즐기는 조선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지요? 세계의 중심지인 한국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통설입니다.
匿名
일본인들은 여러가지 기술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지? 병합하여 일본이 정비한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나라 사람 사귀는 게 잘못이야.뭐든지 자신들이 먼저 한, 위가아니면 안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과는 너무 다르다.
ipa********
보통 일본인 입장에서는 '그게 어쨌다는 거야?' 라는 소감인데요.우주의 모든 것이 한국 기원이 아니면 마음이 풀리지 않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양보할 수 없는 큰 문제겠지.
nan********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웃을 수 있어.
한국은 뭐든지 일본과 비교하고 싶어하지.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보는게 좋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을 비교하고 있으면 다른 나라에서도 웃음을 살거라고 생각하지만.
xkw********
아니 축구 자체가 한국 발상 아니야?
(´·ω·))
공을 사용한 태권이 축구의 원형이라는 벽화에 적혀있지 않을까?모르겠는데!
ジムビーム
어라?옛날 축구는 남조선이 기원이야~
계속 바보 같은 소리 하지 않았어?
무엇이든 기원으로 삼고 싶은 나라 남조선에 행복하라
gth********
한국인이 아닌데 누가 먼저 시작했니 문제제기는 너무 웃겨요.ㅋㅋ
Investigate korea
쓸데없어.한국인과는 사귈 수 없어요.
オンドレHAジャイアン
그런거 아니무니다.
일본 쪽이 나중이무니다.
어디선가 들려올 것 같군
mtn********
아무래도 좋아.한국이라도 괜찮지 않아?
snp********
축구 msg 치고 군데군데 거짓말 섞이지 않았어?ㅋ
mik**www
>일본인과 한국인은 누가 먼저 축구를 시작했어?
어디라도 좋아 ㅋㅋㅋ
air********
축구의 기원은 한국같네 그들이 말하게 시킨다면야..
bre********
조만간 축구의 기원은 조선이라고 할 것 같아. 일본의 축구 기원도 조선 이라고 하거나.
번역기자: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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